문어 내장과 먹물로 끓인 국? 경남 사천의 숨은 별미 '문어먹창국'

 

낯선 이름에 이끌린 발걸음, 문어먹창국과의 첫 만남

경남 사천의 삼천포 어시장, 활기 넘치는 항구의 아침 풍경 속을 걷다 보면 수많은 식당들이 저마다의 맛을 뽐내며 여행객을 유혹한다. 비릿한 바다 내음과 흥정 소리가 뒤섞인 정겨운 골목을 두리번거리다, 문득 '산청해장국'이라는 간판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바닷가에서 만난 내륙의 지명도 잠시,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문어먹창국'이라는 지극히 낯선 메뉴 이름이었다.

미식의 세계는 때로 낯섦과 경이로움 사이의 경계에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문어숙회나 볶음이 아닌, 그 내장과 먹물을 온전히 담아낸 이 음식은 바로 그 경계에 서 있는 듯했다. 이름만으로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맛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식당 안으로 이끌었다.

문어먹창국


검은 국물에 숨겨진 바다의 지혜, 문어먹창국의 탄생

잠시 후 마주한 문어먹창국은 검붉은 국물 색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뚝배기에서 끓어오르는 모습은 구수한 된장 향을 풍기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묵직함을 자아냈다. 국물 한 숟가락을 떠먹는 순간, 입안에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감칠맛이 퍼져나갔다. 이 맛의 정체는 무엇일까.

문어먹창국의 진한 검은 국물


문어먹창국은 남해와 통영 등 남쪽 바닷가 사람들에게는 어머니의 손맛과 유년의 기억을 소환하는 소울푸드다. 예로부터 귀한 식재료였던 문어를 머리부터 내장, 먹물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활용하던 지혜가 낳은 음식인 것이다. 갓 잡은 싱싱한 문어의 먹물주머니와 일부 내장(먹창)을 된장, 시래기와 함께 푹 끓여낸 이 음식은 고된 뱃일을 마친 어부들의 허기를 채우고 기력을 보충해 주던 귀한 보양식이었다.

검은 국물에 숨겨진 맛의 과학

문어먹창국의 가장 큰 특징인 검고 진한 국물은 바로 문어의 먹물에서 비롯된다. 문어 먹물과 내장에는 글루탐산을 비롯한 다양한 아미노산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깊은 감칠맛, 즉 '우마미'를 내는 핵심 성분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구수한 된장이 더해져 발효 식품 특유의 복합적인 풍미가 어우러져 흉내 내기 어려운 맛의 조화를 이뤄낸다.

또한 문어에 풍부한 타우린 성분이 국물에 온전히 녹아들어 맛은 물론 영양까지 채워준다. 먹물이 가진 약간의 짭조름함과 바다 내음은 그 자체로 천연 조미료 역할을 하며 국물의 맛을 한층 더 깊고 진하게 만든다.

부드러움과 구수함의 완벽한 조화, 시래기

이 특별한 국물 맛의 균형을 잡아주는 중요한 조연이 바로 시래기다. 부드럽게 삶아낸 시래기는 문어 내장의 쫄깃한 식감과 대비를 이루며 씹는 즐거움을 더한다. 동시에 시래기 특유의 구수한 맛이 문어 내장과 먹물의 강한 개성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 전체적인 맛을 조화롭게 만든다. 식이섬유가 풍부한 시래기는 국물의 질감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

집밥의 영역에 남은 귀한 맛을 만나다

이토록 매력적인 문어먹창국을 식당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이유는 재료의 신선도와 손질의 까다로움 때문이다. 문어 내장과 먹물은 신선도가 조금만 떨어져도 비린 맛이 강해지기에 갓 잡은 문어로만 조리할 수 있다. 또한 먹물주머니가 터지지 않게 분리하고, 깨끗하게 내장을 손질하는 과정은 오랜 경험과 노하우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이유로 문어먹창국은 대중적인 상업 음식보다는, 그 맛을 아는 현지인들의 '집밥' 혹은 '할머니의 손맛'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쉽게 맛볼 수 없다는 희소성이 이 음식에 대한 그리움과 특별함을 더하는지도 모른다. 삼천포 어시장에서의 우연한 만남은 단순히 낯선 음식을 맛본 경험을 넘어, 바다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지혜, 그리고 따뜻한 추억이 담긴 살아있는 음식 문화유산을 만나는 귀한 기회였다.